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요시나리 (문단 편집) == 생애 == 모리 요시유키의 아들로 오와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미노 국에서 토키 가를 섬겼는데, 이후 [[사이토 도산]]이 토키 가를 패배시키고 멸하자 오다 가를 섬기게 된다. 오다 가에 들어간 이후 노부나가의 측근이 되어 충성을 바친다. 이 당시에 노부나가는 뭐 하나 부각되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음에도 모리 요시나리는 노부나가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섬길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노부나가가 오다 가를 계승하자, 요시나리는 오와리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키요스 성에서 오다 노부토모를 토벌한다. 이후 미노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사이토 도산을 돕기 위해 출정, 그를 구원했다. 같은 시기에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유키|노부유키]]가 배신하자, 이노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로도 노부나가의 굵직굵직한 싸움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우키노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에도 참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나리의 공을 기려 카네야마의 성주로 삼는다. 노부나가가 상경할 때에는 후배 시바타 카츠이에와 함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아네가와 전투에서도 참전하여, 이소노 카즈마사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노부나가를 향해 돌격해오자 그를 저지했다. 노부나가가 서쪽을 정벌하러 떠났을 때 요시나리는 우사야마 성에 남아 있었는데, 이 곳은 쿄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노부나가 포위가 결성되고 아자이 가와 아사쿠라 가의 연합군이 쿄를 향해 진격하자 사카모토의 길목을 막고 버틴다. 이때 천 명의 군사로 싸워 3만 대군을 물러나게 하여 연합군을 주춤하게 했다. 연합군이 다시 침공해오자 마찬가지로 나가서 맞아싸웠다.[* 요시나리의 목적은 진군을 저지하는 것인데, 우사야마 성 안에서 농성하는 것만으로는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연합군의 총공세에 패배하여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하루와 함께 음력 9월 20일에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48세였다. 노부나가는 요시나리의 죽음을 알고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에 아자이 가와 아사쿠라 가에 혹독하게 보복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당시 요시나리가 맞아 싸웠던 연합군에 히에이잔 승병들이 참전했다는 것을 알고는 히에이잔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히에이잔은 영험한 산으로 익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한 번 엔랴쿠지에 사람을 보내 "우리편을 들거나 아니면 중립이라도 지켜라" 하고 언질을 줬으나 엔랴쿠지에서는 무시했다. 그 결과는 초대형 산불(...)] 모리 요시나리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준 쇼주라이코지(聖衆来迎寺)라는 절만 무사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